삶과 죽음이 나의 뜻대로 되지 않음은 그것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한켠에서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다른 한켠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그 자리가 과연 누구의 죽음으로 연결 되었을지라도- 반가움의 사람들이 공존한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얼마전 롯데 그룹 신격호 초대 회장이 운명을 달리했다. 잘나갔을 때 천하를 호령하는 부유층이었지만 떠나 갈 때는 한줌 쥔 것 없이 흙으로 돌아간다.
생명의 신비로움으로 우리는 아이를 맞이한다. 그 아이는 커서 세상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아이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세상을 떠난다. 넓은 땅덩어리를 움켜 쥐었던 징기즈칸도, 無所有를 말씀 하셨던 법정 스님도 예외는 없다. 결국 죽음이란 결말은 모든 인간에게 정해져 있다.
오뚝이는 넘어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어차피 일어서면 다시 넘어지는 일 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뚝이는 그대로 넘어져 있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넘어졌다 일어 섰다를 반복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오뚜기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어떤 오뚝이는 넘어져 일어나지 않을테고, 어떤 오뚝이는 일어났다가 넘어졌다가를 반복할 것이다. 어차피 정해져 있는 결말. 우리는 어떤 오뚝이가 진리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어차피 넘어지면 일어서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오뚝이처럼 인간에게 죽음이 정해져 있다면 결국 주목하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살아가는 과정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타인에게서 어떠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은 한번에 만들어 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지만, 죽음이 정해져 있기에 이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타인을 평가하고 내가 숨을 거둘 때 그 평가가 나의 삶이 된다.
지독하게 잔인하리 만큼 냉정한 사람의 곁에는 많은 이가 함께 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 앞에 그를 평가 할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고, 그 또한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 안에서 만들어진 결과이다.
내 삶을 직선으로 표현 한다면 현재 나의 삶은 직선의 시작과 끝 중 어느 부분에 위치하여 있을지. 그리고 그 직선안에 모인 무수한 점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조금은 궁금해 진다.
대학시절 성남과 인천을 넘나들며, 동서울 터미널 매표소 위에 걸려 있던 커다란 현수막의 글귀가 생각난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과거에 우리가 했던 생각의 결과다”.
나는 이 글귀를 뼈에 새기고 오늘을 살고 있다. 내가 직선의 끝에 도착했을 때 나를 위해 울어 줄 그들에게 기억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