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쌓인 남은 약,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큰일 나는 이유

감기약 반 통, 언제 처방받았는지도 모를 알약 봉지, 한 번 쓰고 방치된 안약. 우리 집 약통을 열면 어김없이 나오는 것들이다. 그런데 유통기한 지난 이 약들을 어떻게 버리고 있는가? 2025년 환경재단이 전국 시민 4,06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 중 9명은 폐의약품을 분리배출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정작 1년 안에 약을 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 절반 가량이 종량제 봉투나 싱크대, 변기에 그냥 흘려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의 이 거대한 간극이 지금 강과 토양을 조용히 오염시키고 있다.

왜 약을 그냥 버리면 안 될까 — 강에서 돌아오는 약 성분

변기에 흘려보낸 물약, 종량제 봉투에 버린 알약. 그 약들은 어디로 갈까. 폐의약품이 매립되거나 도시 하수로 배출되면 공기, 토양, 수질오염을 유발해 생태계 교란의 원인이 된다.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가정에서 버려지는 피임약이나 항우울제의 영향으로 수컷 물고기가 간성(수컷·암컷 특성이 혼합된 성)으로 변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고, 항생물질에 내성을 가진 슈퍼박테리아가 출현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국내에서도 하천과 호수 등 지표수를 조사한 결과 항생제, 소염진통제, 항히스타민제, 진통제 등 약 15종의 의약물질이 검출돼 논란이 된 바 있다. 내가 버린 약이 먹는 물과 먹거리를 통해 다시 내게 돌아오는 구조다.

의약품
사진 출처: 위키백과

‘안다’는 착각 — 실제 정답률은 절반도 안 됐다

환경재단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4,068명 중 93.8%(3,818명)가 폐의약품을 분리배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 중 92.3%(3,525명)는 배출 방법도 안다고 답했다. 그런데 실제로 조제약·일반의약품 등 정확한 분리배출 대상을 제대로 이해한 시민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47.9%(1,948명)에 불과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모르는 ‘인지의 착각’이 확인된 셈이다.

1년 내 폐의약품을 버린 경험이 있는 응답자 2,264명 중 48.4%(1,096명)는 종량제 봉투(32.9%), 싱크대·변기(7.0%), 재활용품 수거함(3.6%) 등 일반 생활폐기물과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했다. 절반 가까이가 잘못 버리고 있다는 뜻이다. 더불어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폐의약품 수거량은 712.8t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이는 전체 발생량의 극히 일부다. 초고령사회 진입으로 의약품 복용이 늘어 2025년엔 약 6,700t의 폐의약품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수거율은 여전히 10% 수준에 머물고 있다.

폐의약품 연간 발생 추정량 대비 수거량(t)

약 종류별 올바른 버리는 법 — 형태에 따라 다르다

폐의약품 수거의 핵심은 ‘전용 수거함에 넣는 것’이지만, 형태에 따라 준비 방법이 다르다. 헷갈리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다.

  • 알약·캡슐: 포장 비닐, 종이, 케이스를 분리하고 알약만 따로 봉지에 담아 밀봉 후 배출한다.
  • 가루약: 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포장지를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배출한다.
  • 물약·시럽: 새지 않도록 마개를 단단히 닫고, 유리병에 든 경우 플라스틱 투약병에 옮겨 담아 배출한다.
  • 연고·안약·코 스프레이: 특수 용기에 보관된 약은 내용물을 억지로 꺼내지 말고 용기 그대로 수거함에 넣는다.
  • 조제약 봉투: 개인정보가 적힌 약 봉투는 분리해 일반쓰레기로 버리고, 약만 따로 배출한다.

수거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 지금 바로 찾는 법

실천을 막는 가장 큰 장벽은 역시 ‘접근성’이다. 시민들은 분리배출을 실천하지 못한 이유로 수거함 접근의 어려움(30.9%)을 가장 많이 꼽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수거함은 가까이에 있다.

  • 약국: 동네 약국에 폐의약품 전용 수거함이 비치돼 있는 경우가 많다.
  • 주민센터·보건소·구청: 전국 어디서나 이용 가능한 가장 기본적인 수거 장소.
  • 우체통: 서울시는 우정사업본부와 협력해 우체통을 활용한 24시간 폐의약품 분리배출을 가능하게 했다. 전용 봉투에 담아 동주민센터에서 받은 뒤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 위치 검색: 공공데이터포털에서 ‘폐의약품 수거함’을 검색하거나, 서울 거주자라면 ‘스마트서울맵’에서 가까운 수거함 위치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제, 결국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개인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이 문제는 구조적인 해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는 제약회사가 무료로 폐의약품 반환 및 회수 설비를 제공하고 연간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며, 미국은 생산자책임재활용(EPR) 법으로 제약회사가 직접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자율 수거에 의존하고 있어 참여율이 낮다.

폐의약품이 2017년 생활계 유해폐기물로 지정된 지 8년이 됐지만 수거율은 여전히 10% 안팎이다. 지금 우리가 약을 버리는 방식 하나가 강과 생태계, 그리고 내 건강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약통 정리 한 번을 다시 생각해볼 때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