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이 ‘북향민’이 됐다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우리가 왜 북향민입니까
‘북한이탈주민’이라는 공식 명칭 대신 ‘북향민(北鄕民)’이라는 새 이름이 2026년부터 공식 사용되고 있다. 통일부가 주도한 이 명칭 변경이 “낙인 효과를 없애고 사회 통합을 촉진하자”는 취지였는데, 정작 3만 6천여 명의 당사자들 사이에선 정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2일 국가인권위원회까지 통일부에 공식 권고를 내리면서, ‘이름 하나’를 둘러싼 논쟁이 본격적인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

북향민, 어떻게 등장했나
‘북향민’은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이라는 뜻이다. 통일부는 2026년부터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인식 개선과 사회 통합 차원에서 북향민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북한 출신이면서 남한 국민으로 살아가는 북한이탈주민의 복합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가치중립적·포용적 용어라는 게 통일부의 설명이다.
이 명칭이 하루아침에 나온 건 아니다. 통일부는 2023년부터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에서 북향민 용어를 사용하는 운동이 시작됐다고 설명하며, 정부는 이러한 노력에 공감해 다양한 의견 수렴과 연구 용역, 전문가 자문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북향민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 장관은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으로 재임할 당시에도 ‘새터민’ 용어 도입을 추진한 바 있다.
당사자 53.4%가 “불필요하다”고 했는데도
문제는 여론조사 결과가 정부 의도와 정반대였다는 점이다. 통일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한 명칭 변경 찬반 조사 결과, ‘불필요하다’는 탈북민이 53.4%로 더 많았다. 일반 국민 및 북한이탈주민 각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조사는 중간 과정에서 조사 방식이 변경되는 등 방법상 일부 오류가 있어 내부 참고용으로만 활용된다고 통일부는 전했다.
북한이탈주민인 A씨는 자신이 탈북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9월 통일부가 실시한 명칭 변경 여론조사에서 배제됐다고 주장하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명칭을 변경하지 말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음에도 통일부가 강행하고 있다는 것이 진정의 핵심이었다.
50개 탈북민 단체가 국회 앞에 모인 이유
대한민국에 정착한 3만 6,000여 탈북민 사회는 탈북민 명칭을 북향민으로 바꾸려는 통일부 방침에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탈북민 단체들은 해당 명칭이 탈북의 역사와 정체성을 지우는 것은 물론, 북한 정권의 시선을 의식한 정치적 언어 조작이라며 철회를 요구했다.
탈북민 출신인 국민의힘 박충권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50여 개 탈북민 단체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탈북민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출신 표기가 아니라 자유를 향한 탈출과 생존의 기록”이라며 “이를 ‘북향민’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바꾸려는 것은 역사 지우기이자 당사자 부정”이라고 말했다. ‘북향(北鄕)’이라는 단어가 ‘북쪽을 향한다’는 의미로도 읽혀 오해를 부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인권위가 2026년 7월 2일 통일부에 권고한 것
국가인권위원회는 통일부 장관에게 현행법상 북한이탈주민으로 규정하고 있는 명칭을 변경할 때 당사자 의사를 수렴하고 공론화 과정을 거칠 것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사안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인권위는 진정에 대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과의 관련성은 없고, 북향민 명칭 변경은 해당 부처 정책적 재량에 속한다고 보고 인권위가 판단할 사안은 아니라고 봤다. 즉, 명칭 변경 자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 게 아니라 ‘어떻게 바꾸느냐’의 절차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인권위는 “북한이탈주민의 의견을 수렴했거나 동의를 충분히 확보했다고 보기 어려운데도 이미 통일부 홈페이지와 각종 행사에서 현행법상 용어인 북한이탈주민이 아닌 북향민 명칭을 단독 또는 병행해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당사자를 지칭하는 명칭은 관련 당사자의 정체성과 명예감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며 향후 정부가 관련 정책을 추진할 때 탈북민 의사를 존중·반영해야 한다고 밝혔다.
법률은 아직 ‘북한이탈주민’…현실은 이미 혼용 중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어야 한다. 현재 법률상 공식 용어는 여전히 ‘북한이탈주민’이다. 이를 바꾸려면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야 하며, 통일부는 기존 탈북민 표현에 부정적 어감과 낙인 효과 등이 있다고 보고 대체 용어를 검토해왔다. 즉, ‘북향민’은 아직 법적 용어가 아니라 통일부가 행정적으로 쓰기 시작한 표현이다.
찬성 측 당사자들의 목소리도 있다. ‘북향민’ 용어를 지지하는 탈북민으로는 경흥 출신의 작가 조경일이 있으며, 그는 북향민이라는 호칭은 2012년쯤부터 당사자들이 직접 제안하고 써왔던 호칭이라고 밝혔다.
이 논쟁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
명칭 하나가 이렇게 뜨거운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정체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탈북민’이라는 이름에 낙인이 찍혀 있다는 통일부의 판단도, ‘탈북의 역사를 지운다’는 당사자들의 반발도 모두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 정부가 ‘포용’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포용하려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한 채 진행했다는 인권위의 지적은 이 논쟁의 핵심을 찌른다.
2025년 ‘새터민’이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사라진 선례가 있다. 북향민이 그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3만 6천 명이 직접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이름을 바꾸는 것보다 중요한 건, 누가 그 이름을 불리느냐를 결정하는 권리다.
참고 자료
- 인권위 “북한이탈주민→북향민 변경, 당사자 의사 반영돼야” – 뉴스핌
- “탈북민→북향민 변경 과정에 문제”···인권위, 통일부에 “당사자 의견 충분히 들어야” – 경향신문
- “우리가 왜 북향민입니까” 통일부 일방통행에 절규하는 탈북민들 – 샌드타임즈
- 통일부 “탈북민→북향민 논의 오래전부터”…인권위, ‘당사자 의견 수렴’ 권고 – SPN 서울평양뉴스
- 노동신문, 오늘부터 ‘일반자료’…내년부터 ‘탈북민→북향민'(종합) – 뉴시스